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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04, 2012

tama t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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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우리에 존재는 우연의 산물이며 인생은 우연의 만남의 연속이다.
그래서 모든 만남은 <목숨을 건 도약>(가라타니 고진)이다.
출처: 아래
http://blog.naver.com/jongsoo1023?Redirect=Log&logNo=70121963212

출처: 아래
http://www.hicnunc.net/down/entry/%B0%A1%B6%F3%C5%B8%B4%CF-%B0%ED%C1%F8-%C5%BD%B1%B81

탐구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서 부모에게 언어를 습득한다. 이것은 전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며 극히 일반적인 조건이다. 또한 우리가 타자와 대화할 때 항상 어딘가 서로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 또한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경우 서로를 더 잘 이해하려고 한다면 상대방에게 묻거나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타자와 대화하는 것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선다는 뜻이다. 공통규칙은 오직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후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르치고-배우는' 비대칭적 관계가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상태이다. 이러한 관계는 결코 비규범적인(abnormal) 것이 아니다. 규범적인(normal) 경우, 즉 동일한 규칙을 갖는 대화 쪽이 오히려 예외적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러한 대화가 자신과 동일한 타자와의 대화, 다시 말해 자기대화(모놀로그)를 규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자기대화 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화는 언어 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13-14)

'가르치다'라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태도를 변경한다는 말은 간단히 말해 공통의 언어 게임(공동체) 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전제할 수 없는 장소에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타자를 만난다. 타자는 나와 동질적이지 않다. 또한 나와 적대하는 또 하나의 자기의식도 아니다. 물론 그러한 장소는 우리의 방법적 회의를 통해서만 발견된다. (18)

예를 들어 마르크스는 상품 교환이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분명히 지적한 대로 공동체 내부에도 교환은 있으며 교환 체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이다. 그 '사이'는 어디 어디라는 공간적인 문제가 아니며 언제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인 문제도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그것은 '추상력'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언어 게임)와 공동체 '사이'에서 어떻게 교환(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인 것이다.
그것은 약분가능한(commensurable) 것을 조금도 지니지 않은 두 개의 다른 물건이 어떻게 등치되는가 하는 질문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교환은 예컨대 가족 내부에서 일어나는 교환처럼 그렇게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앞의 질문은 동일한 물건이 다른 공동체에서 왜 다른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오직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만 교환 문제(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어려운 것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 교환 관계를 가치 형태로서 논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라는 관계의 비대칭성으로 논하고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하자면 그것은 바로 파는 입장과 사는 입장의 비대칭성이다. 이 비대칭성은 결코 지양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이라는 관계의 비대칭성 또는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관계의 비대칭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마르크스의 업적은 본인의 말대로 교환의 기저에서 그러한 비대칭성을 발견한 데 있다. 그것이 바로 가치 형태이다. (19)

요컨대 공동체란 공동성이며 바로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 있는 '영역'인 것이다 .(21)

다시 한번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은 경제학에서 가치 형태와 교환 관계의 비대칭성이 은폐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어학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언어학은 이른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의 비대칭성을 은폐한다. 비대칭적인 관계를 은폐한다는 것은 관계 또는 타자를 배제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야콥슨의 경우처럼 언어학은 고전(신고전) 경제학과 같은 교환 모델, 예컨대 메시지(상품)-코드(화폐)-메시지(상품)라는 모델에서 출발한다. 이는 공동체 내부의 교환만을 보는 것이다. (21)

예컨대 음운은 음성과 달리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은 의식 속에 어떤 의미가 이미 존재하는 경우, 그러한 경우에만 의미를 변별하는 형식으로서 나타난다. (22)

<우리가 말하는 가치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원리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즉 언어 안에는(다시 말해 하나의 언어상태 안에는) 오직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차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사이에 수립되는 적극적인 말의 항목을 상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어 안에는 적극적인 말의 항목을 갖지 않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바로 거기에 역설적 진리가 존재한다. (『일반언어학 강의』)>
하지만 자국어 안에서 생각하는 한 누구도 의미가 적극적으로 존재한다는 실감을 없앨 수 없다. (23)

바꿔 말하자면 사람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뜨도 '쓰다'라는 동사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라고 했는데 '말하다'라는 동사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무언가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하는 것이다(예컨대 유아는 '의미도 없이' 그냥 재잘거린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그것을 들을 때 그 말이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사전에 그러한 '의미'가 내적으로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해버린다.(32)

한 단어 또는 한 행을 쓸 때 우리는 글이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라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것을 우리 자신의 '의도'로서 회수한다. 다 쓴 다음에는 스스로도 바로 이런 것을 쓰고 싶었다고 생각해버린다. (33)

타자가 당신은 말하고 쓰기 전에 또는 그 과정에서 내심으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그렇지 않다고 증명할 방법이 없다. (33)

체계의 변형을 개개인의 실천에 돌릴 수 없는 이상 우리는 차이 체계가 스스로 변한다고(자기차이화) 할 수밖에 없다. 즉 인간의 실천과는 무관하게 언어 자체가 스스로 활동한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로에서 빨간 불에 멈추어 설 때 마치 빨간 불 자체가 우리를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43)

예컨대 언어가 표준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의미하는' 일이 성립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위태롭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구별을 허용하지 않은 곳에 비트겐슈타인적 회의의 철저함이 존재한다. 언어가 원래 대화적이고 타자를 향하고 있다는 바흐찐의 주장조차도 이제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타자를 '우리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예컨대 외국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이 타자가 아이든 동물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말하고=듣는 주체'에게 '의미하는' 일의 내적인 확실성을 잃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근거없는 위태로움 속으로 몰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44-45)

거듭 말하지만 '의미하는' 일이 그러한 타자에게 성립할 때 바로 그런 한에서만 '맥락'이 있고 '언어 게임'이 성립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의미하는' 일이 성립하는지는 끝내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성립한 뒤에는 왜 그리고 어떻게 성립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즉 규칙, 코드, 차이 체계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해 철학이든 언어학이든 경제학이든 이 '어둠 속의 도약'(크립키) 또는 '목숨을 건 도약'(마르크스)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규칙은 사후에 발견되기 때문이다. (45)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이 우리(대자 존재)를 응고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컨대 고양이의 시선에 대해서는 왜 그렇지 않을까. 그때에는 '언어 게임'이 거의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타자는 우리에게 이따금씩 관심을 두는가 싶다가도 전혀 무관심한 고양이와 닮았을지도 모른다. (46)

'짐작한' 바와는 '다른'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그에게는 철학의 출발점인 것이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전후(前後)'에 관한 '조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난점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조망(perspective)'은 니체의 '계보학'과 유사하다. 이 조망은 니체의 '원근법적 도착', 즉 '규칙에 얽매인' 상태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니체의 계보학은 동일 의미(규칙)를 불확정성. 무근거성 또는 다양성. 다방향성 안으로 되돌려주는 것, 다시 말해 '다양한 힘이 발현되는 장(場)'으로 되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57)

애당초 '아픔'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게임' 속에서 습득된 언어의 용법에 지나지 않는다. (63)

<매일매일 진행되는 언어 게임 각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다양성은 우리의 언어 치장이 모든 것을 균일화하기 때문에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철학적 고찰』)(74)

'언어 게임'이라는 개념은 규범적(normal) 커뮤니케이션을 전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심하는 곳에 존재한다. 즉 규범(norm) 혹은 동일하고 표준적인 '의미'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그것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조명하려는 것이다. (82)

'신용'이란 결국 '판매'를 관념적으로 선취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용'이 유발하는 시간적 지연은 어떤 의미에서 자본의 운동을 역전시킨다.(122)

신용제도는 자본 운동의 회전을 가속화한다. (...) 신용 제도 하에서 자본의 자기운동은 축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결제'를 한없이 지연하기 위해 강요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23)

예를 들어 "말해진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설명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어 자체는 설명될 수 없다"(『철학적 문법』)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서 말을 가르치고 또 배우는 것일까. 신비적인 것, 즉 말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상투적인 표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말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대한 언어(메타 언어)라는 생각을 부정한다. 물론 그것은 그가 '가르치다-배우다'라는 관점에서 언어를 고찰하게 된 다음의 일이다. (131)

모든 설명은 사후적인 설명이며 합리화이다. (159)

Posted by administrator at January 4, 2012 04:4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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